마술 책갈피

from Le Signet 2008/05/04 22:29

몇 일 전에 책갈피를 하나 선물받았다.
마침 가지고 있던 책이 1년 전에 민언니에게 물려받은 폴리오판이었는데
쪼꼬만 책에 끼워준 책갈피가 딱 보기 좋아 입이 귀에 걸렸었다. :D<- 이렇게
 
하지만 읽는 게 너무너무 느린 나는 한 달에 원서 한 권 읽기도 정말 힘들어서
- 뭐 사실 한 두장 읽고 가방 속에 쑤셔 박아놓는게 문제긴 하다. -
과연 이 책갈피를 이번 달 안에 다른 책으로 옮길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책갈피가 마술 책갈피였던거지.
쁘띠 니꼴라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다 읽는데도 근 한 달이 걸렸던 내가
모디아노를 3일만에 다 읽은 거다.

물론 니꼴라나 이번에 읽은 책의 두께를 보면 뿌듯해 하는 내가 우스워보이겠지만
일단 나는 한국말 읽기 능력조차 심하게 딸리는데다
(그러니 내가 외국 문학을 둘 씩이나 전공한건 사랑으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거나 마찬가지다!)
외국어를 읽을 경우 문제가 더 심각해서 한 번에 단 서너페이지도 못 읽고 던져버린다는 점을 생각했을때
한 번에 몇 시간씩 진득하게 책을 보게 만든 이 책갈피의 능력은 정말 마술이다 마술.

책갈피를 샥 빼서 다음 읽을 책으로 옮겨 끼우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이제야 프랑스에서 욕심 껏 사온 뽀슈 판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 리스트에 끼워둘 수 있겠다.
작년 6월부터 근 1년동안 나의 손길을 기다려온 우리 귀염둥이들,
안나 가발다도, 보리스 비앙도, 호망 갸리도 모두모두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랑해 줄테다♡





고맙다고 말 해야 했는데, 영 입이 안떨어졌다.
다음엔 꼭 제대로 이야기 해야지.




2008/05/04 22:29 2008/05/04 22:29


일곱 권 중에 세권은 에세이에 가까운 비문학, 한 권은 시집, 세권은 소설이었다.
그래도 일곱권을 포스팅 한번으로 다 담기는 좀 지루하겠다 싶어
문학, 비문학으로 나눠 두번에 정리하기로 했다.

앞 포스팅에 이어, 두번째는 문학 :)


4

생일 - 장영희 글 /김점선 그림

4월에 정말 잘 어울리는 시집이었다.
이 책도 엄마가 선물받으셔서 내게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그림과 아름다운 시를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예쁜 책이다.

총 마흔 아홉편의 영시들을 묶어 펴냈는데, 존경하는 장영희교수님의 친절한 번역이 달려있어
본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 영시 읽기에 소질없는 나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았다.

이 책은 매일 밤 잠들기 전, 하루 한편 씩 쓰지 않는 노트에 옮겨 적으며 읽었다.
물론 중간에 빼먹거나 집에 다녀오는 주말에는 밀리기도 했지만,
그럴 땐 또 몇 일 두편씩 적고 읽으면 되었다.

3월 3일부터 4월 20일까지 꼬박 일곱주 동안
에밀리 디킨슨이나 새러 티즈데일, 바이런이나 브라우닝들의
짤막하고도 따뜻한 감성을 품고 잠들 수 있어 행복했다.


5

달콤한 나의 도시 - 정이현

알고 지내는 학교 선배가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며
'난 정말 요즘 참을 수 없이 싫은 작가가 있어.' 라는 이야기를 하길래
'정이현이요?' 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내 입에서 너무나 쉽게 튀어나온 정답에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사실 정이현이 싫지 않다.
하지만 벌써 내 주변의 세 사람이 정이현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을 놓고 내 귀에 못을 박았고
그러는 동안 나는 약간 그녀가 가여워졌다.
그리고 그 뿐, 달리 그녀의 책을 읽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웹서핑을 하다가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라마화 된다는 기사를 읽고 호기심이 확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한참 후, 잘 다니는 집근처 북까페에 '달콤한 나의 도시'가 꽂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들를때마다 짬짬히 책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재밌게 읽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마포구, 딱 보니 우리 동네라 신기했다.
솔직히 소설보다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한 편 보고난 느낌이었는데, 영화화하면 쪽박, 드라마라면 괜찮을 것 같다.
정이현은 오늘날 2,30대 여성의 '일반적인' 생활에 촛점을 맞추고 재미있는 글을 써내는데 재능이 있다.
그래서 좀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인 색채를 띄는것도 분명하고, 때문에 가볍다, 쓰레기다 하는 소리도 종종
듣는것 같지만 그녀의 성실한 호흡과 경쾌한 감각은 전혀 나쁘지 않다.
사실 그래서 읽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김훈도 있고, 정이현도 있어야 하는 거니까.  


6

플라스틱 피플 - 파브리스 카로

이 책은 뮹뮹에게 강력 추천.*

예전에 스타벅스 서가에서 굴러다니는 걸 보고 관심을 두었다가, 헌책방에서 거의 새 책인걸 주워왔다.

프랑스의 젊은 감성, 색다른 상상력을 십분 느낄수 있었던 소설.
책 자체는 아주 쉽게 잘 읽히는 편인데 젊은 프랑스인들의 일상을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다면
톡톡 튀는 감각을 갖춘 작품임에도 상당히 밋밋한 인상에 재미없는 소설로 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술술 책을 읽어 나가다가, 불현듯 번역자조차도 이미 프랑스적인 일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불어 단어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히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문제를 떠나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풍경이 대체 어떤 느낌인지를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능력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혹은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독자의 문화권, 배경 지식에 달린 문제이기는 하다.
이미 대중들이 익숙하게 여기는 일본, 미국 문화상품들과 비교하면 그 외는 모두 제3세계나 마찬가지.
어쨌든, 프랑스인 친구와 교제해 본 일이 있다거나, 프랑스에 체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면 장면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피귀렉이라는 극단적인 존재 집단은 이미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장례식에 찾아와 자리를 채워주고, 부모 앞에서 결혼할 연인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
작가 파브리스 카로에게 '한국에는 정말로 예식장 아르바이트라는게 있답니다'라는 e-mail을 쓴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아, 한국에서는 이미 피귀렉이 공개적으로 활동을 개시했군요, 제 작품이 뒷북을 친 꼴입니다' ?

이미 '연출'에 너무나 익숙한 이 현실이라는, 그리고 허구라는 리바이어던의 끝은 어디일까.
우리는 모두 그 어떤 끝으로 치닿고 있는 걸까.

 
7

The house on Mango Street  - Sandra Cisneros

얇디 얇은 한 권.
코엑스에 들렀다가 반디에서 충동구매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책이 예뻤고, 쉽고, 짧아서.

읽으면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생각났다.
어리고 애처로운, 그러나 스스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
읽는 동안 많이 웃고, 그 따뜻한 시선과 생각에 감동하기도 했다.

작가는 미국 태생으로 영어로도 쓰고 스페인어로도 쓰는 멋쟁이 바이링구얼 이모지만 작품은 확실히 남쪽이다.
꼭 커피같기도 하고, 초콜릿 같기도 한. 따뜻하고 씁쓸하고 달콤하고, 그리고 외로운 이 느낌은
남미사람들의 정서인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Como agua para chocolate ; Like water for chocolate)'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타고난 천성이랄까, 남미의 끝도 없이 타오르는 태양이 빚어낸 성품이랄까.
잿더미같은 인생조차도 긍정하게 만드는 그 곳 사람들의 심장은
그들과는 빚어짐 자체가 다른 내게 늘 매력적이다.

중남미 문학권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이들은 분명히 세계 문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영미문학이나, 아직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멀기만한
아시아 문학권이 내놓지 못하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거라고 믿는다.
그들이 그리는 여성의 연약함과 강함, 그 매혹적인 내면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2008/05/02 14:09 2008/05/02 14:09


4월 한달동안은 신상에 여러 심란한 일들이 일어나 차분히 책을 보기가 어려웠다.
일이 터지면 바로, 빠르게 대처해야만 하는 문제들도 있지만,
개중에는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시간을 들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두어가지를 제외하면, 4월과 함께 다른 여러 일들은 수월히 지나온듯 싶다.

늘 월 초에는 지난 달 마지막날까지 마친 책들을 정리하고,
이번 달에 새로이 읽어들일 책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수첩을 들여다보니, 4월 한달 동안은 읽던 책들에, 읽으려던 책 몇 권을 더해
꽤 잡다한 목록을 만들어놓았다.  

남이 들여다보면 흉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는 즐거웠던 일곱 권.


1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에세이

엄마와 여러번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책을 권해주신 것도 엄마였고 다 읽었다고 말씀드렸을때도, 참 좋아하시면서 무슨 생각이 들더냐고 물으셨다.
(아, 귀여운 엄마)
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 싫은 마음 보다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해보려고 했다.
절대적일 수는 없더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크고, 긍정적이다.  

나는 적어도 이곳저곳 아픈곳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구나.
일상을 편안해 하고, 큰 상처없이 살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이렇게 살아오기가 의외로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나의 세계'라는 것은, 스스로 아무리 애써 지켜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너무나 쉽게 흔들리게 마련이니.
다 자라기 전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나의 세계를 단단히 지켜주는 부모님께,
그리고 내게 상처주지 않고 스쳐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그 외에도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들에게 뭔가 구체적인 힘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한 권이었다.
자신 만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상처에 비추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을테니까.
아이들을 보아도, 내 어린시절을 헤아려 보아도 일생에 부모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이제는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도, 내가 부모가 된다면, 을 생각하는 나이인 만큼,
이 책이 무겁게 짚고 넘어간 이 '부모'라는 개념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싶은 에세이들이기도 하지만 그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독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이,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이유가 아닐까.


2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 오주석

아주 재밌게 술술 읽어낸 그림 책.
얼마전에 서점에 갔다가 오주석씨의 새 책이 나와있는 걸 봤는데, 꽤 여러권 책을 내시는 분인것 같다.
책마다 하고 있는 이야기가 꽤 겹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해서 한 두 세권만 잡아 읽으면
적당히, 넘치지 않는 유익한 공부가 될 듯 싶었다.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이 책엔 좋은 그림, 좋은 글귀가 많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다 읽고 난 다음 날, 바로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서 이채 초상과 변상벽의 모계영자도를 보고 왔는데
비행기 타고 날아가지 않아도 이렇게 좋은,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았던 그림은 김홍도의 황묘롱접도였는데,
그 그림이 사랑스럽기도 하거니와, 어른의 생신잔치에 만수무강과 자손번성의 의미를 담아 주고받은 그림이라는데 의미가 있어 그도 한번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있다. 참고로, 간송미술관에 있단다.

우리나라와 한국에서의 내 생활을 돌이켜 보기에도 좋은 책이었다.
아직은 내 자신속에 쌓인 것이 많지 않아 뭐라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 안에 무엇을 쌓아나가야 하겠는가에 대한, 작고도 분명한 답을 주었다.
알아야, 알릴 수도 있는 법이다.


3

헤밍웨이, 파리에서 7년 - E.M. Hemingway

"Paris est une fête (파리는 축제다)"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 머무르던 동안 읽고 싶어했던 책인데,
국내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게 되었다. 표지도 예쁘고, 들어가있는 사진들을 보니 꽤 공을 들인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번역이 썩 훌륭하지 않다. 여기저기서 문장이 자꾸 걸리는데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초벌번역체'가
심하게 거슬려, 평소 페이퍼백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영어판을 찾아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물론 매우 훌륭한 불어 번역판도 있다.

생각보다 읽는데 시간이 들어 나중에는 안되겠다 싶어 이 책만 달랑 한 권 들고 비하인드에 가
녹차 라떼와 카푸치노를 마시며 다 읽었다. 그 날 책 말미에 헤밍웨이의 새로운 사랑에 분개한 나머지
친구 둘에게 전화까지해서 짜증을 낸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헤밍웨이가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의 이야기를 읽으며 빠리가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그가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사적인 면모도 관심을 끌었는데,
무엇보다도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읽으며 "위대한 개츠비"에서 묻어나는
피츠제럴드의 분위기를 단박에 이해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개츠비 한번 더?)
아내 젤다와의 관계, 글을 쓰기 위해, 과거의 어느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젤다와 군인의 관계를 지켜본 피츠제럴드의 심경, 그 모든 분위기가 작품에 녹아있었다.

후에 헤밍웨이의 작품들을 더 읽게 된다면, 나는 이 책에서 먼저 만난 그를 더듬어 찾게 될까.

마무리가 해들리와의 결별이었던 점이,
그가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에 못내 울고싶을 만큼 속상했다.

 



2008/05/02 12:26 2008/05/02 12:26

안녕, 사월

from Le Signet 2008/04/30 11:16


When you leave you must remember to come back for the others.
A circle, understand?
You will always be Esperanza. You will always be Mango Street.
You can't erase what you know. You can't forget who you are.

- The House on Mango Street



4월의 마지막 날,
게을렀던 한 달 간의 책 읽기도 마지막.

안녕, 에스페란자.

2008/04/30 11:16 2008/04/30 11:16

녹신녹신

from Le Signet 2008/04/28 11:23



_ 하루하루 어떻게해서든 밸런스를 유지한다.



샤워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글이 있어 아침을 먹으면서 다시 읽었다.
지난 달에 읽은 에쿠니상의 단편.
'녹신녹신'이라는 제목이었다.

읽고 나서 '뭐 이래, 이런 건 좀 빼지' 하는 소감으로 다음 단편으로 넘어간 걸 기억하고 있다.

뭐, 누군가에게 빠져 아무리 힘들어도
그 감정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다른 남자들을 두 셋이나 더 만난다는 건
지금의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니.

하지만, 오늘 아침에 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말았다.

2008/04/28 11:23 2008/04/28 11:23

코마와용, 헤밍웨이

from Le Signet 2008/04/17 13:02

"함께 그곳에 들렀다가 부둣가를 따라서 산책도 합시다."

"화랑과 상점의 진열장들도 볼 수 있게 센 강 쪽으로 내려가요."

"물론 어느쪽으로든 갈 수 있소.
그리고 우릴 아는 사람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없는 까페에 들러 차 한잔 하지."

"두 잔씩 마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어딘가로 가서 식사도 할 수 있소."

"아녜요, 책방에 돈을 가져다 줘야 하잖아요."

"좋아. 그럼 집에 돌아와서 식사하기로 하고, 건너편 협동조합에서 본산의 좋은 포도주를 사서
곁들일만한 좋은 요리를 만듭시다. 그리고나서 책을 좀 읽다가 잠자리에 들어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우린 서로 외에 그 누구도 사랑하기 없이에요"

"그렇고 말고"

"정말 멋진 오후와 저녁이 될거예요! 얼른 점심부터 먹어요"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군. 까페에서 작업하면서 크림커피 한 잔밖에 못마셨거든"

"잘 되가고 있어요?"

"내 생각엔 그래. 그러길 바라지. 점심은 뭔가?"

"감자퓨레와 야채 샐러드를 곁들여 송아지 간요리랑 작은 무우를 먹을거예요.
후식은 애플파이랍니다."

(중략)

"실비아에게 헨리 제임스의 책들도 있나요?"

"물론이지."

"정말이에요?"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런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운이 좋잖소"





요즘 읽고 있는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Paris est une fête)"의 한 대목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방문하고 돌아온 헤밍웨이와 그 아내의 대화
참 사랑스러웠다. 저 일상적인 부부의 대화가.

모처럼 서울 하늘이 하늘 빛이다.
우리 집의 좋은 점은, 바닥에 앉아 창을 바라보면 하늘만 가득 하다는 것.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을 보는게 얼마만인지.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얼굴 단장, 몸 단장을 하고 앉아
책을 보고 포스팅을 하는 오전시간이 참 좋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후 일도 슬슬 참 잘 된단 말이지.
여러가지 일들이 가득하지만, 내 일상은 여전히 마음에 들어
참 다행이다.




2008/04/17 13:02 2008/04/17 13:02

단원

from Le Signet 2008/04/13 13:14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의 소나무에 채 녹지 않은 눈이 가지에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다가.


2008/04/13 13:14 2008/04/13 13:14

어쩌다가

from Le Signet 2008/04/11 11:45



...
그러니까 결국 회화 감상이란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담아 그려 낸 그림을,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으로 읽어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도 옛 사람의 마음이라니 원,
마음이란 것은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의 속도 열 길 물속보다 알기가 어렵다는데 말이지요.


-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다가,





어쩌다가 나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지고 말았을까요.

이것 참, 어려운 노릇입니다.











 
2008/04/11 11:45 2008/04/11 11:45

마무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책들에 관한 이야기로 해 볼까 한다.

어릴때부터 동화책을 아주 좋아했는데 - 물론 나도 어린이였으니까! -
다 크고 나서도 동화책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고등학교때는 진지한 마음으로 열심히 동화책을 모으기도 했다.
당시 (중학교때부터 나의 오른팔이었던) 나방팔크로부터 선물받은 다섯살용 동화책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즐거운 마음으로 읽는다.  

나의 비밀노트, 스위트벨리 쌍둥이 시리즈 같은 소녀문고나,
the worst witch 시리즈, 꼬마 니꼴라 같은 아동 문고 시리즈도 아주아주 좋아해서
옛날 '지경사'에서 나온 번역본이며, 영어, 불어 원서들을 제각각 몇 권 가지고 있다.
만약에 아이가 생긴다면 물려주고 싶은데, 그러자면 영어랑 불어까지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고민이다.


1

자전거 못 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
-장 자끄 상뻬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쌍뻬의 책.
꼬마니꼴라에 담겨있는 아이들 세계의 심오함(!)도 그렇지만,
사실 상뻬의 유머와 빛나는 기지는 어른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게다가 프랑스 스케치, 빠리 스케치 같은 화집이며, '속 깊은 이성친구' 같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운치는
상뻬의 예술적 감수성과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전거 못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 - 마르슬랭 까이유'와 같은 선상의 작품인데,
읽는 동안 몇번이나 웃음이 터져서 스스로 놀랐다.
상뻬의 그 단순해 보이는 그림체 속에서 어느 순간 빛나는 진지한 유머는
읽는 사람을 참 유쾌하게 만든다.

아주 어린아이들 보다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에게 권할만 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참 혼자서 머리가 복잡할 시기의 아이들에게 '좋은 감수성'을 심어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하는 게임이며, 만화책, 드라마(...) 등을 완전히 차단시켜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정작 그런 매체들에 사로잡혀 어린나이에 아름다운 그림책도 즐길 줄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리는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

Charlotte's Web
- E. B. White

'샬롯의 거미줄'을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사온 페이퍼백들을 모두 뗐다.
다들 쉬운책들 뿐이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물론 안 읽고 내팽겨쳐뒀기 때문이지만...)

나를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던 '샬롯의 거미줄'
이 유명한 작품을 이제야 읽었느냐고 타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정말 아름다운 아동문학 작품이었다.
(언젠가 생길지도 모를) 내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작품 넘버 원.

평화로운 시골 농가를 배경으로 독특한 캐릭터의 동물들이 꾸미는 이야기라는
설정만으로도 아이들의 정서함양에 마구마구 도움이 될 것같은 느낌이 든다.
솔직히, 애들까지 갈 것 도 없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정서가 순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얼마나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그려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마음 약한 돼지 윌버와 지혜로운 거미 샬롯, 얄미운 생쥐 템플레톤, 귀여운 거위들, 나이 든 양들이 함께 사는
외양간의 풍경은 상상만 해도 따사롭고 행복한 느낌이다.  

특히, 'Brilliant, Beautiful, Loyal' 세단어로 말할 수 있는 거미 샬롯은
아이들 뿐 만 아니라 내게도 좋은 롤 모델이었다.
첫 인상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스럽고 지혜로울 뿐 만 아니라, 사려깊고 마음 따뜻한 이 거미 때문에
앞으로는 집안에서 거미를 봐도 쉬이 없애기 힘들 것 같다. (아, 단순한 인간)

이 이야기의 장점을 꼽자면, 딱히 좋고 나쁜으로 나뉘지 않는, 다양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각기 다른 성격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성품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 B. White는 '스튜어트 리틀'의 작가로도 이미 유명한 바 있다.
원래 스튜어트리틀도 무진장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White가 나랑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다.
좀 벗어난 이야기지만,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좋아했던 남자에게 '스튜어트 리틀 2'를
보러 가자고 했다가 냉정한 반응 - '그건 애들 영화잖아' 라는 - 에 깊이 상처받았던 적도 있다.  

어쨌든, 당장 조카나,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영화도 꼭 챙겨보자.



2008/04/05 00:25 2008/04/05 00:25

3월에는 꽤 다른 스타일의 범죄소설 두 권을 함께 읽었다.
일본에서 온 미야베 미유키와 미국에서 온 제드 러벤펠드.
내가 미야베 여사의 애독자라는 사실은 지난 'Le Signet' 포스트들을 보면 금방 눈에 띌테고,
제드 러벤펠드는 동생이 사다놓은 걸 내가 물려읽게 되었다.
두 권 모두 서점에서 봤다면 내 흥미는 끌었을지언정 집어 들지는 않았을 것 같은 스타일들인데
친구 덕, 동생 덕에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1

스나크 사냥
- 미야베 미유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군은 읽어도 읽어도 줄지 않는다.
지금까지 꽤 열심히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읽을 만 해 보이는 새 책들이 턱까지 쌓여있다.
한꺼번에 몰아보기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도서관이나, 주변인들을 통해 기회가 될 때
한 권 한 권 아껴가며 읽을 생각이다.

스나크 사냥은 절친한 친구인 프레지당뜨 뮹뮹님의 협찬으로 빌려 읽었는데,
하 많은 미미여사의 책들 가운데 제목도, 표지도 선뜻 고르지 않았을 분위기였기 때문에  
뮹언니가 아니었으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작품이었다.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고,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아주 예의바르게)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캐럴의 스나크 사냥은 텍스트를 쉽게 구할수가 없는지라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 '스나크 사냥'이 번역되면서 초판 한정으로 캐럴의 스나크 사냥도 소책자 형식으로 발행하여
독자들에게 선물로 안겼다던데, 정말 대단히 친절한 출판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읽은 건 2쇄 였다. 아까비!)

상당히 터프한 제목이지만 기존의 미야베 여사의 분위기는 그대로다.
매력적이고 정이 가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어쩔 수 없는 이 사회의 '이름없는 독' 같은 인물들도 존재한다.
독특했던 것은 작품의 구성인데,
일본 현대 사회의 단면을 하나씩 깊게 들추는 미야베식 정통 사회파 소설들이
대단히 깊이있는 취재를 통한 배경지식과 함께 상당히 길고 진중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면
단 하룻밤에 걸쳐 일어나는 이 사건의 스피디한 전개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 쪽이든, 탄탄하고 정교한 구성력은 감탄할 만 하다.
낚시와 사냥, 그리고 총에 관한 이야기가 외외로 무척 흥미로웠다.
쏘는사람에게 돌아오는 산탄총과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 사이의 줄긋기, 그리고
괴물과 그를 공격하는 괴물에 관한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2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이 책이 막 출간되었을 당시,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영미권 소설의 경우, 번역본을 사지 않으려는 편이라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몇 달 전에 우울한 동생과 서점에 갔다가 동생이 이 책을 골랐다.  
덕분에 동생이 먼저 읽고, 부담없이 내가 물려읽었다.

190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심리 범죄 소설이라는 것 만으로도 여러 사람의 구미를 당겼을 법한 작품이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심리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여러가지 요인을 안고 있음은 분명하다.
덕분에 '다빈치 코드'처럼, 이 소설도 영화화 될 예정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뉴욕의 갈색 풍경을 찍은 사진을 물에 띄우고 여러가지 염료를 풀어
종이에 찍어낸 마블링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읽어온 몇 안되는 미국 범죄 - 미스테리 - 소설들의 공통점은
한 작품에 들어가는 자료의 양이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팩션(fact+fiction)을 골자로 하는 역사물, 범죄물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런 경향은 존 그리샴 류의 소설들이 한참 잘 나갔던 시절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하지만 과잉이랄까.
다빈치 코드를 끝까지 읽고 그 허무함에 한숨을 내 쉰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 할 만한 빈약함을 이 작품 역시 끝내 떨쳐내지는 못했다.
심리학 전반에 걸친 '자극적인' 지식들과 그 자체로서는 눈을 번쩍 뜨게 할만한
햄릿에 관한 새로운 정신분석학적 고찰 등 이 책에는 여러가지 재밌거리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지나쳐 좀 어지럽다, 급기야는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자료는 많지만 정작 사건의 얼개 자체가 빈약해 그 자료들조차 결국 곁다리에 지나지 않아 아쉽다.

이 소설을 읽고 '누나, 재밌긴 한데 좀 허무해'라던 동생의 말을 소설의 결말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소설도 블록버스터급, 혹은 그렇게 만들어 질 것을 염두해두고 쓰는 미국인가 싶어 웃음도 났다.

어쨌든, 사실과 최대한 부합하기 위해 실존했던 인물, 사건, 심지어는 1900년대 뉴욕의 모습을
소설속에서 최대한으로 재현해내고자 했던 작가의 공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해당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사람까지 고용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읽는 동안 기억을 더듬어 뉴욕의 이길 저길을 헤아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2008/04/04 10:42 2008/04/04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