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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 마이스키 & 비엔나 체임버 오케스트라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 @ 예술의 전당
2018.6.14

70 세의 첼리스트가 활을 긋자 믿을 수 없는 차이코프스키가 흘러나왔다. 하이든 1악장의 컨디션 난조에 느꼈던 불안함은 이내 감사로 바뀌었다. 미샤 마이스키가 들려준 그 풍경과도 공기와도 같은 소리를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비엔나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모차르트를 들려주었다. 교과서적이면서도 화려하고, 흥겨웠다. 오스트리아의 정서, 비엔나 사운드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뭐니뭐니 해도 흥이 아닌가 싶다.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에는 유통기업 특유의 - 모든 유통업체에 다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 섬세함이 잘 녹아있다. 연주자 섭외, 레퍼토리 선택, 초대와 안내, 차와 다과의 구성이며 행사장의 분위기까지 모두 세심하게 준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손님을 초대해서 공들여 대접하는 자세에는 단순한 VIP 마케팅 이상의 감동이 있다.  


2018/06/16 01:32 2018/06/16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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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황혼
Le crépuscule des dieux (Gotterdammerung)
WAGNER
Paris Opéra Bastille
(le 3 juin 2013)


바그너 링 사이클 마지막 장을 보고 왔다. 그 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작년 말 오페라 네 편을 예매하며 느꼈던 막연함은 분명하고 개인적인 감상으로 남았다. 지난 2월부터 한 달에 한 편 꼴로 공연 일정을 따라가는 동안 흥미를 잃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객석에 앉은 채 집에 가고 싶어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이전에도 썼지만 나는 바그네리안도 아니고,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링 사이클을 선택한 데는 내 허영 섞인 호기심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을 둘러싼 수많은 담화 속 에서 나는 내가 모르는 그의 음악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일단 경험하고 싶었다. 공연을 올리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지 않은 프로그램인 탓에 시기도 맞아줘야 하는데, 내 프랑스 체류와 파리 오페라의 일정이 맞았다. 연이라고 생각했다.

 

링 사이클을 보고 있노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 호기와 인내심을 칭찬해주었다. 앞서 말했듯 겨우 자리만 지킨 순간도 없지는 않았지만 ‘니벨룽겐의 반지는 단순히 러닝 타임만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버티기만을 요구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 자체는 오히려, 청중이 원하는 청각적 즐거움을 끊임없이 선사한다. 그것은 때로 여느 오페라에서 듣기 힘든 가수의 힘찬 노래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 귓전에 걸리는 익숙한 모티브이기도 하고, ‘발퀴레의 비행과 같은 말 그대로 선동적인 선율이기도 하다. 일례로 청중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 현대음악의 괴로움 물론 그 안에는 다른 즐거움이 깃들어 있지만 - 을 생각하면,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에게 클래식한 의미에서 듣는 기쁨을 선사한다.

 

무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미니멀했다. ‘라인의 황금만큼 실망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파리 오페라의 연출은 크게 만족스럽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현대 음악이 그렇듯, 관객이 원하는 것을 부러 주지 않는 것이 현대 예술이 지닌 한가지 성향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2013년 파리의 링 사이클은 그 연출 만큼은 매우 현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신들의 멸망 장면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대에 설치한 스크린위에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 게임의 한 장면처럼 신들을 총으로 쏘아 쓰러트리는 영상을 띄웠는데, 정말 뜬금없기로 이 지구상에 따라갈 자가 없는 연출이었다. 오페라신에 FPS를 못쓸 이유는 없다. 문제는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이 이해할수 없을정도로 조잡해 이전 네시간동안 유지해온 일종의 미니멀한 고급스러움을 다 마신 콜라캔처럼 한방에 찌그러트려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객석의 칠할은 중년 이상, 절반은 백발의 노신사,부인들이 채우고 있었는데 그 레인보우식스도 울고 갈 총질 앞에 그분들의 당혹은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진정 파리 오페라가 원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였던가. 한숨이 나왔다.

  

여하튼 다섯 달에 걸쳐 네 번을 만나는 동안 음악이 귀에 붙어 따라가기 수월해진 덕에 네시간 십오분의 러닝타임과 한시간 반의 인터미션은 전에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에 반가움과 기쁨을 느꼈다. 당연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지만,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그리고 음식도, 그 어떤 것이건 일단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안목이란 단순히 가장 좋은 것,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알아보는 눈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각각의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 대상에 대해 개별적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안목이다. 보는 눈이 있으면 자연스레 본인의 기준에 따른 줄세우기도 가능할것이다. 안목이 귀한 것은 경험치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눈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지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순수하게 본인을 즐겁게 하는 아카이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의 소실점은 결국 나를 아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덧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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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8 23:55 2013/06/0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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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Opera National
Siegfried
2013 Opera Bastille

오후 여섯시에 바스티유에 들어가 열 한시를 훌쩍 넘겨 나오는 프로그램은 역시 만만치 않다. '발퀴레'에 비해서 음악이 세지 않고, 스토리면에서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좀 덜하기 때문인지, 공연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굉장히 지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눈과 귀를 열어놓고 정신줄은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시간 오십오 분.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을 내내 집중해서 본 다는건 평소에도 남다른 산만함을 자랑하는 내게 애시당초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게다가 앞서 두 번의 공연에서, 중간중간 찾아오는 좋은 대목을 더 맑은 정신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졸리면 졸고, 자막을 읽기 싫으면 무슨 얘긴지 모르고 넘어가는게 낫더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졸고, 적당히 지루해하는가 하면, 때로는 눈을 크게 뜨고 때로는 웃어가며 니벨룽의 반지 제 3 장, '지크프리드'를 봤다.

가장 좋았던 것은 무대, 센scène이었다. 1, 2, 3 막이 모두 마음에 들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 느낀 건데, 나는 컬러풀하거나 세부적인 무브먼트가 있는 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막에서는 무대 위 식물들의 초록과 빨간 소품들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색감에서 어딘가 모르게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분위기를 느꼈다. 지크프리드를 데려다 키운 난쟁이 미메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함은 물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막에서 대장간의 큰 환기팬이 실제로 돌아가며 무대위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만든다거나, 인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꺼진다거나 하는 부분들에도 눈이 갔다. 왜 그런 데 반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시절부터 인형의 집 주방 놀이의 오븐에 실제로 빨간 불이 들어온다거나 냉장고에 플라스틱 우유곽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데 무척 감동하곤 했다.

이번에도 가수들의 노래에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지크프리드 역의 토르스텐 컬 Torsten Kerl은 그 긴 공연 내내 쉬질 않는데도 시종일관 힘차면서도 편안한 - 힘있는 후륜구동 독일명차의 안정적인 승차감을 떠올리게 하는 - 노래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두려움을 모르는 어린 지크프리드를 어찌나 그렇게 천진하게 연기하시는지. 지크프리드가 나무가지를 질질 끌며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그 귀여움에 웃음을 터뜨린 관객은 나 뿐이 아니었다. '발퀴레'에서부터 완벽한 브륀힐데로 눈길을 끌던 알윈 멜러Alwyn Mellor 는 이번에도 비범하고 아름다운 브륀힐데로 분했다. 사실 가수들에게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는 우스울수 있지만, 모든 오페라 가수가 공연장을 나올 때, 노래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에 브로셔를 한번 더 찾아보게 하지는 않는다. 이 날의 가수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내용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을 다 보고서 불현듯 떠오른 농담이 있었다. "네 남자친구 태어났대. 가봐." '발퀴레' 에서 지크프리드의 부모인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지켜주고 그 벌로 영원의 잠에 빠졌던 브륀힐데는 (우리식으로는 조카 뻘인) 지크프리드의 키스로 긴 잠에서 깨어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돌고 도는 인간사,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신화의 세계는 오늘 날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잰 걸음으로 바스티유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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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8 00:15 2013/04/0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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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opera national
L'Anneau de Nibelungen - La Walkyrie /R. Wagner
2013 Opera Bastille




'라인의 황금'을 보고 난 감상이 실망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인지, 이어지는 '발퀴레'에 대한 설렘은 반감에 반감을 거듭, 급기야 티켓을 끊고 나면 공연 전까지 의식적으로 몇 번은 하는 '귀에 붙이기(전체 감상)'는 커녕 1막만 겨우 찾아 듣고 마는 무성의로 한 달을 보냈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일정이 잡히면 열심히 떼창 준비를 하며 복습을 하듯,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라는 게 필요하다. 게다가 나는 바그네리안을 자청할 수 있는 수준도 못 되기 때문에 그런 밑준비 없이 가서는 못 따라가고 잠들게 뻔 했는데도 영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통상 쉽지 않다, 입문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마주하게 된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일단 오페라 팬이라면 상대적으로 익숙할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 (레치타티보 + 아리아)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극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강 약 중강 약 하는 식으로 조절하게 되는 집중의 리듬 타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게다가 길기는 또 오지게 길어서, '라인의 황금'은 중간 휴식없이 두시간 반을 내리 달리고, '발키리'는 순 공연 시간만 세 시간 사십 오 분이다. 체력 좋은 독일 작곡가 답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바그너에 일단 덤비고 보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없는 대신, 그의 음악극에는 특정 인물이나 장면을 상징하는 유도동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음악적 장치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특정 선율을 기억하고 있으면 극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고, 특히 '발퀴레'는 많은 영화 감독, 음악 감독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던지라 직간접적인 매체 노출이 많았다. 의외로 '들으면 아는' 대목이 많은 작품인 것이다.
 
때문에 힘들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 도중에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졸리기도 했지만 나의 무성의함에 비하면 무척 친절한 공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전편에서 느낀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연출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더 휘황찬란한 눈요기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 전 작품을 다 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운을 떼기는 조심스럽지만, 내가 본 링사이클 절반과 다른 작품까지 통틀어 느낀 바, 대부분의 경우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의 연출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이지만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spectacular! spectacular!'를 지향하는 쪽은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파리의 오페라 신은 그 이미지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다. 유럽 경기 침체가 당장은 문제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예산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문화계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는 몇 안되는 국가들 가운데 형님 격이고 어느 정도 장사도 잘 하는 편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자주 조명하는 것 처럼 문화산업과 수익성을 기반으로 한 모델이 아니다. 현대에 지어진 오페라 바스티유의 모토가 오페라의 대중화였듯 파리의 문화 예술계는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혜택'이 아닌 '더 많은 예술애호가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향'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이곳에도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과 그들의 경제력 간의 끊을수 없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허나 앞서 말한 프랑스 예술계의 모토는 더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을 끌어 안는 원동력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풀만 벗겨보면, 프랑스 문화계 종사자들은 언제나 예산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성공에 성공을 거둔 호퍼의 그랑팔레 전시의 이면에는 예산확보를 위한 대관사업과 작품 대여료 인하를 위한 눈물겨운 네고가 있었다. 매 두 달에 한번 쯤 오페라 나시오날에서는 업커밍 공연들의 할인 혜택을 적은 우편물을 보내온다. 순수한 소비자인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 사치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예술소비와 더, 더, 더를 외치는 일은 관둘 때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예술과, 그 예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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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21:32 2013/03/1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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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Opera National
Das Rheingold / L'Or du Rhin
2013 Opera Bastille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
라인의 황금
2013 오페라 바스티유


작년 가을부터 예매해두고 기다렸던 파리 바그너 링 사이클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라인의 황금'.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시즌이라 세계 각지에서 야심찬 프로젝트들이 예고된 바 있다. 이미 작년 하반기에 개막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링 사이클이 지금까지 공연중이고 릴레이 하듯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이 그 뒤를 이어 올 상반기 반지 시리즈의 막을 올렸다.

작년 가을, 한참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마침 뉴욕에 들러 메트의 '신들의 황혼'을 구경했더랬다. 반지 시리즈 4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긴 했지만 일정상 전 시리즈를 다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있는대로 끊은 티켓이었다. 영화 뺨치는 무대장치와 과감한 스케일로 유명한 메트의 링사이클인지라 한 작품이라도 직접 본다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렇지만 바그너조차도 미국적이랄까, 영화의 영향인걸까. 미제 인터프리테이션이니 미국냄새가 나는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처음에는 눈을 확 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부하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반지의 제왕이나 (아주 좋아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스타워즈 같은 판타지, 혹은 사이언스 픽션 필름의 냄새. '마농'을 보면서도 느꼈던 점인데, 메트의 기획력이나 연출력은 객관적으로 훌륭하지만, 그 스타일이 개인적인 취향에 부합하느냐면 아니랄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종일관 씩씩하게 노래하는 브룬힐데에게서는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기대했다. 파리의 반지시리즈를.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이 최고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지만, 조건상 자주 드나들며 크고 작은 재미를 느낄 기회가 많았다. 각 작품과 작곡가의 정통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혁신을 이어가는 이탈리아나 독일 오페라단들의 연출에 비하면 파리 오페라는 장르 자체의 클래식함은 유지하되 더 과감하고 독창적인 신을 보여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이 오리지널리티로, 아방가르드로, 세련된 미니멀리즘으로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싫기도 했다.

하지만 두시간 반의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실망하고 있음을 느꼈다.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고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기대했던 것 보다 심심했지만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나를 가장 실망시켰던 것은 무대 연출이었다. 사람마다 제각기 기대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무대는 딱히 모던하다고도 독창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이 애매했고 몇몇 의상은 흉하다 싶은 수준이었다. 사람마다 '라인의 황금'에 기대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오페라는 시청각예술이다. 시각적인 감흥을 줄 수 없다면 반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쩐지 나는 파리 오페라의 '라인의 황금'이 무성의하다고 여겨졌다.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거는 기대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반지' 연작은 오페라 네 편이 함께 가는 대작이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주로 네 작품을 순차적으로 모두 관람하며 - 오페라 네 편의 티켓을 함께 구입한다는 뜻이다. - 이야기가 단순하지 않은 만큼 음악적 애정 이상으로 지적인 관심을 쏟는다. 때문에 세계 유수의 오페라 하우스들이 반지 시리즈의 연출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이다. 링 사이클은 무조건 블록버스터급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시켜야 할 관객의 기대가 큰 만큼 어떤 스타일이건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각적 완성도가 동반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나의 실망은 그런 측면에서 가졌던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아마도 그날의 실망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이날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의 박수소리에서는 으레 섞여있기 마련인 흥분섞인 탄성이나 찬사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3/02/10 03:02 2013/02/10 03:02

MANON

from Carnet de spectacle 2012/02/16 03:46
MANON
/MASSENET
OPÉRA BASTILLE
le 13 fev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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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있으니 이왕이면 프랑스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봐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때, 이미 '마농'의 티켓은 수 주 전에 오픈되어 100 유로 이하의 좌석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드뷔시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를 예매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쉬움도 잊어가던 어느 저녁, 번역 숙제가 싫어 책상 앞에서 몸을 비비 꼬고 앉아있는 내게 오페라 파리가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오늘 밤 마농 퍼스트 카테고리 Category 1 좌석 30유로에 줄테니 오라고. 1분 쯤 고민했던것 같다. 그러나 보고싶던 오페라를 좋은 자리에서 보며 숙제까지 내팽개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내가 아니다. 바로 줄거리 출력해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바스티유로 향했다.

이번 마농은 오페라 나시오날 파리가 새롭게 연출해 올린 새 버전, 소위 '신상'으로 무대 곳곳에서 참신하고자 공을 들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압권은 가수들의 의상으로, 마농의 사촌오빠 레스코가 정말 위 그림 우측 빨간 삐죽 머리를 그대로 하고 나와 노래를 부른다. 빨강과 검정이 얼룩덜룩한 머리를 말미잘처럼 세우고 금속 장식을 찰그랑 찰그랑 달고나와 노래하는 바리톤이라니. 여기에 남성 성악가다운 실팍한 체격이 더해져 현실적인 퇴폐까지 묻어난다. 후에 찾아보니, 이미 여러 오페라단이 '모던한' 마농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 클래식에 가까우면 클래식, 모던에 가까우면 모던으로 대부분 어느 정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듯 했는데, 오페라 파리는 17세기 귀족풍 흰 가발 쓴 아저씨부터 갱스터 룩까지 등장시켜 마치 마스네의 시대와 2012년이 혼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여기에 고전적인 한편 장식적이고 화려한 마스네의 음악이 묘한 대비와 조화를 완성해 신scène 전체가 마치 '이것이 마농의 21세기적 인터프리테이션 interpretation이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마농 역은 마리안느 피셋Marianne Fiset이라는 작고 예쁘장한 소프라노가 맡았는데 어떤 매력이나 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역할에 잘 어울렸고 젊은 용모에 비해 노래를 잘 했다. 반대로 상대역인 데 그리외Des Grieux 역의 장 프랑수아 보라스Jean-François Borras는 무대위에서 역삼각형으로 보일 정도로 어깨가 넓고 체격이 좋아 두 사람이 재미있는 대비를 이루었다. 데 그리외의 테너와 레스코의 바리톤이 무대 전반을 안정적으로 받쳐 주어 마농이 더욱 빛났던 것 같다. 프랑스 오페라이니 당연히 가사는 불어였지만 영화도 다 못알아듣는 비루한 불어로 오페라를 '듣고만 있을 수 는' 없다. 역시 무대 위 전광판에 가사가 제공되었는데, 프랑스 청중들과 불어 공연에 불어 자막을 올려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세시간이 조금 못되는 긴 공연이라 인터미션이 두 번이었는데, 매번 내 오른쪽 앞자리에 앉은 캐나다 마담이 내 오른쪽 뒷자리에 앉은 미국 마담에게 하는 이야기가 거슬려 공연과는 상관없이 한숨이 나왔다. 듣자니 이 캐나다 마담의 딸이 오늘의 주역 마농과 같은 음악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공연을 보러 온 모양이었는데, 소프라노가 캐나다 액센트가 있다는 둥, 아리아의 마지막 고음을 부르지 않아 답답했다는 둥 불이 켜지면 이야기를 시작해 다시 불이 꺼질때까지 그런 류의 비꼬기와 뽐내기를 멈추지 않아 피곤했다. 서울에 있을때부터 예체능계 아이를 둔 부모들 가운데 일부의 극성과 치졸함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여기라고 다른게 없다. 내 아이의 동료가 촉망받는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은 건 알겠지만, 그 교양있고 싶어 안달난 아줌마들이 그런 감정을 주체 못하고 드러내는 게 매우 흉하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2012/02/16 03:46 2012/02/16 03:46

ORPHÉE ET EURYDICE
/CHRISTOPH W. GLUCK
*OP
ÉRA DANSÉ DE PINA BAUSCH
OPÉRA GARNIER
le 12 fev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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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두시 반의 오페라 가르니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두시간쯤 걸려 대 브런치를 먹고서 가볍게 치장하고 면바지에 얇은 스웨터에 세미 정장 재킷을 입은 남편 손을 잡고 가르니에에 걸어오면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내가 그랬다는게 아니고...)

이번 시즌에 본 공연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다시 태어나면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이 날의 댄서들은 마치 나와 다른 종처럼 보였다. 고도로 다듬어지고 훈련된 인간의 육체는 보석보다 아름답다. 게다가 그 움직임이란!

슬프고 강렬한 1막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답지 않고 환상적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보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표를 알아봤는데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오페라와 춤이 결합된 형태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오르페와 에우리디스를 연기하는 댄서와 가수가 각각 이었는데, 에우리디스를 노래하는 가수가 한국인이었다. 오르페에 조금 밀리는 듯 해도 소리가 곱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방가르드하면서도 아름답고 내용까지 좋은 무대의 일원으로 서 있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이날 객석에는 마치 마레지구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사진에서 그대로 오려 온 듯한 남남 커플들이 많았다. 그들은 분명히 늦잠을 자고 일어나 파트너와 함께 근사한 점심식사를 하고 달콤한 기분으로 가르니에에 도착해 이렇게 아름다운 눈요기를 하고 있는거겠지. 생각하니 부러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급기야는 내 마음속에 눈 사람을 만들었다.  



 

2012/02/16 03:43 2012/02/16 03:43

LA DAME DE PIQUE

from Carnet de spectacle 2012/02/16 03:11
LA DAME DE PIQUE
(스페이드의 여왕)
/TCHAIKOVSKI
OPERA BASTILLE
le 6 fev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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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2 시즌,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과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는 러시아를 주제로 다양한 레퍼토리들을 선보였다. 한 가지 큰 주제를 정해놓고 한 시즌 동안 관련 행사들을 다양하게 조직하고 체계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파리 문화계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이 많다. 곧 죽어도 주제sujet와 목차plan와 논리logique에 집착하는 교육의 영향인가 싶어 재미있기도 하고, 풍성한 레퍼토리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력이 감탄스럽기도 하다. 유럽 문화의 강점이랄까, 장기를 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는 그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발레 음악에 비해 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보고나면 한 곡 쯤은 흥얼거리며 집에 돌아오게 되는 - 귀에 잘 걸리는 - 아리아 위주의 이탈리아 오페라들과는 퍽 다르다. 서곡의 완성도가 높고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그래서인지 선이 굵다는 느낌도 받았다. 물론 가수들의 노래가 약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오히려 가수의 체력이 염려될 정도로 강렬한, 혹은 비장한 노래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 장식과 연출이 굉장히 좋았다. 무대 위 공간을 나누어 다른 시공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야 무대 예술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주는 연극적인 분위기와 분열의 이미지가 작품과 잘 어울렸다. 절제된 무대 장식이 주는 심플한 이미지와 톤 다운된 색감이 빚어내는 모던한 분위기도 시각적으로 멋있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음악과 대비를 이루어 독특한 인상을 남겼다.

오페라에 어떤 종류의 문학성을 기대할 것은 아니고, 동명인 푸쉬킨의 원작과도 여러모로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작품이 흘러가는 동안 원작이 가진 성향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표현이 다를 뿐, 주인공의 광기와 나약함,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자니 마치 악보가 텍스트를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돌아오는 길, 오뗄 드 빌Hotel de Ville 메트로 출구를 뛰어 올라가며 역시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노름은 정신병이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2012/02/16 03:11 2012/02/16 03:11

RIGOLETTO

from Carnet de spectacle 2012/02/16 00:04
RIGOLETTO
/VERDI
OPERA BASTILLE
le 27 ja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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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에서 본 첫 오페라. 들어서는것 만으로도 순진한 마드모아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가르니에의 화려함에 비해 1989년에 문을 연 현대식 극장 오페라 바스티유의 첫 인상은 조금 심심했다. 그러나 어지간한 티켓으로는 꼭 무대 어느 한 구석이 가려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가르니에와는 달리, 바스티유는 어지간한 티켓이면 시야에 무대가 다 들어오게끔 설계되어 가난한 학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오페라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무려 '바스티유'에 설립된 극장다웠다. 브라보.

리골레토는 전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상연되는 인기 레퍼토리인데다가, 유명하다 못해 멜로디만 생각하면 식상함까지 느껴질 지경인 아리아 'La donna e mobile (여자의 마음)'을 비롯해 질다역을 맡은 적이 있는 소프라노 조수미 덕분에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아리아가 여럿인 작품이다. 빅토르 위고의 희곡 'Le roi s'amuse (환락의 왕)'를 바탕으로 하는 비극이고, 먼저 찾아봤던 영상물이나 공연들도 주로 그런 비극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살린 연출이 많았는데, 파리 오페라는 그보다는 클래식하며 (아쉽게도) 선을 넘지 않는 점잖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여인들의 드레스가 스르륵 흘러 내리는 장면이나 붉은 쿠션이 층층이 쌓인 농염한 침대 신은 없었지만, 바리톤 제리코 루치치Zeljko Lucic는 '리골레토'의 리골레토에게 관객이 거는 기대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며 모두를 감동시켰다. 오페라 가수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저 놀라고, 나중에는 편안하게 그의 노래를 들었는데, 공연 후에 찾아보니 이미 수차례 리골레토로 분했고 '우리 시대 최고의 리골레토'라는 찬사를 듣는 양반이었다. 역시, 고수는 무지몽매한 이의 눈과 귀에도 뭔가 다르다. 우리의 질다 역은 소프라노 니노 마차이제가 맡았는데, 안정적인 - 질다의 'Caro nome(그리운 그 이름)'를 듣고 있으면, 늘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그 곡을 부르며 관객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소프라노는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 노래와 연기에 젊고 아름다운 자태가 인상적이었다. 리골레토와 질다에 비해 표트르 베찰라의 만토바 공작에게서는 큰 감흥을 얻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역시 그가 부르는 'La donna e mobile'을 들으며 그 멜로디가 식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샴페인을 한 잔 마실까 하고 바에 갔다가 한 무슈가 하겐다즈 바를 먹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아이스크림을 샀다. 하겐다즈 마카다미아 넛 브리틀Macadamia Nut Brittle 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아이스크림 속에 캐러멜 토피가 묻은 마카다미아 조각이 들어있어 끈적끈적하고 맛있었다.

2012/02/16 00:04 2012/02/16 00:04
Tchaïkovski, Prokofiev
Vendredi 06 Janvier à 20H00 Salle Pleyel /Paris
PROGRAMME
Piotr Ilyitch Tchaikovski 
: Concerto pour piano et orchestre n°1
Serge Prokofiev
: Cendrillon (extraits)

Interprète
Mikhail Rudy, piano
Alexander Vedernikov, direction


'나는 여기서도 자 봤다' 같은 주제로 리스트를 만든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지난 금요일의 음악회를 꼭 넣고 싶다.

지난 금요일, 나는 수면 부족과 시험 망침으로 매우 피곤하고 지쳐있었는데 저녁에는 학기 초에 예매해둔 음악회가 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갈까 말까. 프로그램이 차이코프스키와 프로코피예프라는 것 말고는 교향곡인지 협주곡인지, 누가 나오는지 나와서 뭘 연주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티켓 끊어놓고 늘 이렇게 무성의한 건 아니다. 여튼 마구 끊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빼먹느냐는 마음 속 무서운 언니의 힐난에 침대 속에서 늘어진 몸을 일으켜 플레이옐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홀에 사람이 굉장히 많은 건, 평소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내가 좀 늦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싼 티켓을 산 나는 지난번에 앉았던, 맨 꼭대기 맨 뒷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자리보다도 훨씬 위의 지붕 아래 난간과 의자 사이에 쳐박혔고 내 앞으로도 뒤로도 사람들이 꼬깃꼬깃 다리를 접고 앉아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오늘 좀 이상하네.' 그리고 프로그램이 시작하자마자, 단 1초만에 알았다. 아. '빰빰빰빰'이로구나. 클래식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텔레비전 보급률이 50%를 넘는 나라의 국민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그 차이코프스키'.

안심했다. 아, 다행이다. 적어도 졸지는 않겠구나. 아는 곡을 들으며 자는 일은 없다. 나는 확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간중간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왜 저 아저씨는 피아노를 저렇게 대충치나 원래 저런 스타일인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프랑스 뮤직France Musique 이 재방송해준 공연실황 녹음을 들으니 내 기억과는 전혀 달랐다. 잠에 취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력 극 감퇴의 상황에서도 피아노를 그냥 쓰다듬는것 같은데 피아노가 노래하는 듯 한 소리를 내는 루디Rudy 아저씨의 연주는 인상적이었다. 내가 사족을 못쓰는 '노련미'는 기본으로 탑재하셨고 내가 상상하는 러시아의 서정 - 잘 모르지만, 차이코프스키만을 생각한다면,- 이 반짝거리는 낭만적인 연주였다. 확실히 젊은 연주자들이 또박또박 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확하면서도 더 많은 감흥을 이끌어내는 그런 소리는 진부한 말이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루디 아저씨의 연주에 감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무려 1악장이 끝나고 한 두 사람이 아닌 청중 전체의 박수가 터져나와 룰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콘체르토가 끝나고 인터미션이 있었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집에 갈까 말까. 차이코프스키를 듣는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프로코피에프는 보나마나 숙면이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이나 좀 읽어 볼 것이지. 나는 이렇게 성급하다. 그러나 장애물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난간, 좌우로는 고상한 할아버지 할머니들 틈바구니에 낀 그 날 따라 아무도 쉬는 시간에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동안 누군가 일어났다면 나도 일어나 빠져나갔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콕 쑤셔 박힌채로 프로코피에프님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프로코피예프였다. 프로코피에프가 곡을 쓴 발레 신데렐라 가운데 여러 곡을 추려 연주해주었는데, 동생의 목소리를 빌어 '우와 대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앞 공연 때부터 라디오 프랑스 팀파니 오빠한테 반해있었는데, 거기다 못보던 귀여운 오빠들이 주르륵 나와 탬버린을 통통, 트라이앵글을 칭칭, 심벌즈를 촹촹, 북을 둥둥 쳐주니 너무 재미있었다. 그야말로 '짱 재밌는' 소리들이 가득하면서도 역시 '러시아의 서정(...)'이 반짝거리는 멋진 곡이었다. '라 체네렌톨라 La Cenerentola'를 보고 나서 신데렐라는 봤으니까 이제 됐어, 라며 올 시즌에 걸렸었던 발레 신데렐라를 예매하지 않은 것을  매우 후회했고 CD를 사리라 다짐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데 한 마담이 라디오 프랑스 스티커가 붙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멘 채 씩씩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훅 반했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고 나면 연주가 끝나자마자 빛의 속도로 악기와 가방을 챙겨서 청중들 사이를 슥슥 지나 퇴근하는 단원들을 보게 되는데, 나는 그 모습이 정말 좋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태도에 생활미랄까, 직업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멋지다고 생각한다. 가끔 하는 생각인데, 만약 내가 다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규칙적으로 연습하고 규칙적으로 공연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싶다. 물론 적지 않은 고충이 따르는 직업이지만, 역시 멋있다.



2012/01/11 04:38 2012/01/11 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