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미 이프 유 대어 (Jeux d'enfants)
/Yann Samuell
자유로운 상상력. 리얼리티와 공상의 거침없는 혼합. 서로 사정없이 놀리고 이죽거리고 미워하고 화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둘 만의 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판을 깨고 나가버리지 않는, 콘크리트 더미에 빠져 죽어도 좋은 절대적 로맨스. 그런 사랑을 그릴 수 있는 자유, 과감함, 정열, 상상력.

이터너티 (Etérnité)
/Tran Anh Hung
프렌치 부르주아 판타지를 유감없이 펼쳐낸 패션 필름. 어지간히 예쁨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마저도 영원처럼 느껴지는 권태로운 예쁨의 연속. 그러나 참 좋았던 엔딩.

오리엔트 특급 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Kenneth Branagh
트릭의 정교함이나 자극의 강도보다도 중요한건 아가사 크리스티 특유의 무드와 미술, 캐릭터의 매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기대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했으나 오래 기다렸던 작품을 보는 즐거움은 있었다. 좀 더 정교하고 좀 더 강박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노골적인 고디바 홍보는 고급스럽지 못하고 조금 우스웠다. 좋은 배우들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러나 속편이 나온다면 또 보겠다.

여자의 일생 (Une vie)
/Stephane Brize
몹시 조용하고, 사실주의적 묘사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플로베르에서 모파상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의 전통을 이해하기에 나올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재미는 없지만 상업성이 아닌, 명작의 영화적 재해석이라는 가치있는 목표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참으로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냉정을 넘어서, 주인공의 미련함을, 여자의 바보스러움을 묵묵히 바라보면서도 왠지 비웃는 듯한 그 시선이 연출의 것인지, 모파상의 것인지 모르겠다. 모파상을 읽어 볼 때가 되었나보다.  
 

 
2017/12/29 20:53 2017/12/29 20:53

고법불도장

from Dining 2015/02/16 17:57

비가 내리는 오후다. 으슬으슬 한기가 들어 나는 종일 파자마에 배스로브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몇 일 전 점심에 먹은 불도장을 생각한다. 작은 도자기 합 속에 담겨나온 절대적인 사치를. 노골노골한 모습으로 잠겨있는 전복, 오골계 살, 샥스핀, 제비집, 부레, 표고버섯, 은행, 말린 관자. 그 속에 두반장을 조금 풀어 넣고 중국 스푼으로 호호 한 점씩 떠먹으면 뱃속부터 온 몸이 따끈따끈 해졌다. 그 불도장을 먹고서 바로 아래 객실로 내려가 암막 커튼을 치고 면 시트를 뒤집어 쓴 채 깊은 잠을 자는 상상을 한다.

도림, 소공동.

    
2015/02/16 17:57 2015/02/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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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렛 앤드 클라렛
Raclette & Claret

2014년 연말에는 바깥 송년회를 제외하고 두 번의 저녁 초대가 있었다. 친한 친구 가족과 한 번, 그리고 동생의 친구들과 한 번 이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된 일이다.

재료를 썰어 가지런히 준비하면 끝인 라클레뜨에 몇 년 전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 옆에서 사먹은 버섯 요리를 흉내내 보았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디저트는 대망의 몽블랑. 머랭도 샹티이도 밤크림도 어려울게 없어서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다 따로 준비해야하니 의외로 품이 많이 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휘핑이 어찌나 힘들던지. 키친 에이드든 켄우드든 빨리 하나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역시 비싸고 무거운 재료들을 아끼지 않은 몽블랑은 맛있었다. 다들 좋아해 나중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냉장고에 남겨 둔 것들까지 금세 동이났다. 역시 겨울에는 밤. 이제 매년 겨울에는 밤 파운드와 몽블랑을 만들어야겠다.

음료로 준비한 뱅 쇼는 생각보다 인기가 덜했지만 연말 분위기를 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호사스럽게도 프랑스산 와인으로 끓인 뱅 쇼였는데,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프랑스 와인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사연인 즉, 마트 두 군데에 평소 다니지도 않는 코스트코까지 뒤졌음에도 사려고 정해두었던 팩 와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마트 와인코너의 전혀 사고 싶지 않은 대용량 와인들 앞에서 길 잃은 어린 양이 된 나는 묶음할인에 들어간 심플리 시리즈의 클라렛을 발견했고 또 다시 긴 갈등 끝에 그것을 카트에 담았다. 그것도 묶음 할인이니 여러 병을. 클라렛Claret은 영미권에서 보르도산 적포도주를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무려 라벨에 저 단어가 들어가 있으면 '프랑스 산 와인'이라는 출신 성분 외에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단어이기도 하다. 어차피 끓여먹을 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난 뱅 쇼도 프랑스산 포도주로 끓여먹는다, 우아나 떨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뱅쇼가 생각보다 안 팔린 탓에 이 클라렛은 아직도 우리집에 잔뜩 남아있다. 덕분에 신년 첫 초대 메뉴는 꼬꼬뱅이나 부르기뇽 - 을 보르도 와인으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으로 해야할 판이다.

편안하게만 지내고보니 아쉬움이 가득한 2014년이었다. 별 다른 진척없이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롭다. 신년은 좀 더 생산적인 한 해여야지,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나마 돌아보니, 재작년에 결심했던 계절별 손님초대를 빼먹지 않고 한 해를 마무리 했다는 것이 작지만 분명한 기쁨으로 남았다. 2015년은 편안한 일상보다, 괴롭더라도 더 큰 보람과 결실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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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u winter
2014.12.21
2014.12.24

Madrid mushrooms
마드리드 버섯

Raclette
라클레뜨

Vin chaud
뱅 쇼

Mont blanc
몽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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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에 응해준 나의 친애하는 손님들,
JM Lee & JYR Yoon
JH Lee
Une Petite pomme

GS Ko
JJ Yoon

Merci :)



2015/01/05 18:19 2015/01/0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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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re jolie petite pomme
우리의 이쁜 꼬마 사과

절친 부부의 소중한 사랑의 결실로 생겨나 지난 7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아기 사과가 최근 백일을 맞이하였다. 덕분에 놀기 좋아하는 어른들은 또 한 번 둘러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모와 막역한 지기이기도 하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지금까지의 짧은 육아과정을 줄곳 가까이서 지켜봐 온 녀석이라 조카의 백일 같은 마음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사과를 보고 있으면, 아기는 사랑의 결실이라는 흔하디 흔한 문구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부부의 사랑이 없다면 임신과 출산, 이어지는 양육의 과정은 두 사람 모두에게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피로, 정신적 충격과 우울을 동반하는 심신 황폐화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일정 부분 본능적인 것이라해도, 그 힘든 과정을 함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부부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주변의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사과를 통해 배웠다. 그리하여 시집 못 간 이모는 오늘도 꼭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다는 포부를 다지는 것이다.


근무 일정 탓에 마음이 바빠 준비가 매끄럽지 못했던 점이 두고두고 아쉬운 식탁이었다. 초대 당일 근무가 있어 대부분 레서피 없이도 할 줄 아는 품목 위주로 메뉴를 짰지만 밑준비가 부족한 탓에 손님들이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음에도 시작이 늦어지고 말았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품목은 라자냐였다. 토마토 소스에 허브가 듬뿍 들어갔고, 여러가지 치즈를 쓴 것이 풍미를 향상시켰다. 무엇보다 전날 베샤멜 소스를 세 번이나 만든 보람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음식 양은 충분했지만 전식으로 피자도 하나 더 만들어 올렸으면 더 풍성한 식탁이 되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아쉽다.


쇠고기 등심 로티는 은연중에 내 취향을 강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굽기를 묻고 따로 비앙-퀴 bien-cuit를 부탁한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세냥saignant을 넘어선 블루bleu를 서빙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드고어로 갈 필요는 없었다. 고기가 좋았고 남긴 사람도 없었지만,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디저트는 좀 심심했는데, 전날 마지막까지 메뉴를 수정하는 바람에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생크림 파나코타보다 밀크티 파나코타나 삼색 파나코타를 내고 간단한 장식을 곁들였다면 좀 더 디저트다웠을텐데. 케이크에 아이스크림까지 들어와 먹을 것은 많았지만 다음에는 좀 더 예쁜 디저트를 내고 싶다.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은 호스팅이다. 손님들이 도착했을 때 내 마음이 바쁘면 차분히 접대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밑준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번처럼 당일 근무가 있을 때는 전날 완전히 준비를 끝내 놓는 것이 좋겠다. 손님들이 도착했는데도 호스티스가 부엌에 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반대로 내심 흡족하게 생각되는 점도 있는데, 점점 나아지는 테이블 세팅이다. 올 봄에 처음 친구들을 초대했을 떄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보충되는 부분이 보여 기분이 좋다. 음식도, 접대도 자꾸 해봐야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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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

Menu Automne

 

Pain aux oignons/Pain aux olives

양파 빵/올리브 빵

 

Salade verte aux champignons

버섯 샐러드

 

Lasagne/Fettuccine â la bisque

라자냐/꽃게 비스크 페투치네

 

Contre-filet de boeuf rôti avec des légumes grillées

한우 등심 로띠와 구운 야채

 

Panna cotta

파나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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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에 응해준 나의 친애하는 손님들,


JM Lee & JYR Yoon
BM Kim
HS Ham
MH Ryoo

merci. :)

2014/11/12 13:44 2014/11/12 13:44

Sunday morning ER

from Tous Les Jours 2014/09/21 22:10
1.
일요일 오전 깜깜한 다섯시, 침대에서 끌려나와 세수도 못 한 채 입술이 터지고 손가락이 부러진 남자애들을 태우고 연대 앞을 내달렸다. 내 인생에도 이런 새벽이 있구나. 아직 시집도 못 갔건만, 벌써부터 아들 키우기 겁난다.  
2014/09/21 22:10 2014/09/21 22:10

2014. 08

도원 / 더 플라자

 

사촌 동생에게 축하할 일이 생겨 어디서 맛있는 밥을 먹을까 고민하던 중 플라자 호텔의 중식당 '도원'에 다녀왔다. 최근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좋은 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차였다. 

코스나 잘 한다는 샥스핀, 좋아하는 가지 요리도 궁금했지만 첫 방문에 나름의 졸업이랄까, 책걸이 축하 점심이었기 때문에 일품으로 고전적이기 그지없는 탕수육과 자장면, 그리고 호기심에 지마장면을 주문했다. 한화 호텔앤리조트 외식사업부에서 운영하는 티원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맛만 있으면 조만간 다시 와서 다 먹어 보고 말겠다는 각오였다.

탕수육 소스에 들어있는 생과일과 호텔 탕수육의 클래스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바삭하고 가벼운 튀김옷의 첫 인상은 훌륭했다. 고기 한 입, 과일 한 조각 돌아가며 먹는 것도 별미였다. 다만 덜어 준 양을 다 먹어갈 때 즈음에는 소스의 단 맛이 과하다는 느낌에 그만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웠던 건 자장면이었는데 타이밍의 문제였을까, 받고 비비는데 면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소스에 윤기가 사라져 금새 푸석푸석한 자장면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아마도 공들여 만들었을 소스마저 순식간에 매력을 잃고 말았다. 직원들이 밖을 오가며 분명히 우리의 식사 속도를 체크하는 것 같았는데 자장면이 그렇게 나온 건 아주 실망스러웠다. 

도원 실명제 메뉴에 들어있는 지마장면은 무척 매력있는 면요리였다. 차가운 비취면에 땅콩소스를 부어먹는데 차갑고 달콤하고 고소한 맛에 채 썬 파프리카와 관자가 깔끔하면서도 아쉬움 없는 맛을 냈다. 중식당에 가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자장면으로 식사를 하는, 나는야 자장러버지만 누군가 여기 뭐 특별한거 없나? 하고 묻는다면 권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만족하며 남김없이 다 먹었다. 

디저트로는 망고 시미로가 나왔는데,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들이미는 것이 못마땅했다. 우리가 그렇게 밥을 늦게 먹나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받았다. 그런데 한 스푼 떠먹어보니 망고 주스 맛이 몹시 강해 잠자코 받은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생망고 갈아달라고는 못하지만 냉동 망고 과육을쓰거나 아니면 다른 디저트를 내 줄 것이지, 깡통 망고 주스를 연상시키는 기분 나쁜 뒷맛이 불쾌했다. 

호텔 식당 답게 깍듯하면서도 붙임성 있는 서비스는 좋았다. 직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선을 넘지않는 상냥함은 좋은 인상을 주었다. 문제는 서빙 타이밍인데, 이건 주방과 홀 간에 엄격하게 손발을 맞춰줘야 하는 부분이다. 직원들의 중간 휴식을 잘라먹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먼저 나오는 음식과 나중에 나오는 음식의 조리, 서빙 타이밍은 고급식당을 자처한다면 강박증 수준으로 지켜야 한다. 마감이 가까워졌다고 살짝 살짝 먼저 준비해놓고 파트를 닫는 습관이 맨 마지막으로 그 품목을 받는 손님에게 대단한 실망을 안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턴 시절 나는 아뮤즈 부슈를 조합해 내놓는 일을 했는데 한번은 손님의 예약 시간에 맞춰 플레이트에 가장 먼저 깔리는 퓨레를 미리 깔아놓은 적이 있었다. 손님은 시간에 맞춰 들어왔지만 그걸 본 셰프는 내게 그 접시는 디쉬워셔로 보내고 새로 퓨레를 깔라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퓨레가 마르니까.

도원의 자장면이 원래 내가 받은 자장면 같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장 자체는 고소했고 재료를 다듬은 모양새도 일정하고 깔끔해 고급 중식당의 자장 다웠다. 문제는 그 모든 공을 날려버린, 가장 좋은 타이밍을 넘긴 후에 서브된 것이 분명한 면이었다. 

고급식당에 가는 것은 화려한 분위기에 나 이렇게 비싼거 먹으러 다녀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를 정확한 테크닉으로 조리해 편안하게 서브해 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다이닝에 있어 중요시 되는 모든 기본 규칙들을 정확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고급 식당을 찾는다. 그리고 업장이 그런 기대와 믿음에 부응해 줄 때 시중 음식점의 두 세배 되는 식대가 아깝지 않은 것이다.

 

 

2014/08/27 18:10 2014/08/27 18:10

새벽 꽃 마실

from Tous Les Jours 2014/08/2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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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오전 네시 사십 오 분. 푸르스름한 창을 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뒤척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다섯시 반. 고양이 세수를 하고 홍차를 끓였다. 시동을 걸며 시계를 보니 다섯시 오십 분. 주유를 하고 올라탄 북로에는 제법 차가 많았다. 그래도 반포까지는 삼십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꽃시장 드라이브와 과천 국립 현대 다녀오기였다. 과천은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지만 일단 꽃시장은 해냈다. 나는 운전에 서투르고, 여전히 운전석 보다는 조수석을 좋아하지만, 꼭두 새벽 나를 꽃시장에 데려가 달라고 말했을 때 달가워 할 사람은 택시 기사 뿐이다. 어쨌든, 리시안셔스 두 단과 스토크, 미스티 블루를 한 단 씩 사서 돌아오는 길에는 운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한 밤중 혹은 이른 새벽, 달뜬 마음을 식히기에 꽃 시장 만큼 좋은 곳이 서울에 또 있을까.

꽃을 손질해 물을 올리고 꽂으며 문득 '미친년 꽃다발'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것을 울이라 부르든 조라 부르든 마음이 급격이 기울어 어쩔 줄 모를 때 평정심을 찾는 방법이 꽃이라면 나쁠 건 없다. 이제 나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한 밤 중이든 이른 아침 이든, 혼자서도 꽃을 사러 달려 나갈 수 있으니까. 괜찮다. 나쁠 건 하나도 없다.
 

2014/08/26 00:35 2014/08/2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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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레 꼬삔 Soirée copines (아가씨들의 저녁)

여름을 맞이해 파리와 런던의 친구들이 일시 귀국했다. 여기에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파리시절 친구 둘과 파리를 드나들며 이들 모두와 친분이 있는 박실장을 포섭해 여름 저녁 초대 멤버를 짰다. 쉽지 않았다. 수 개월 전부터 추진, 귀국 일정을 확인하고 가능한 날짜를 그러모아 약 한 달 전 날짜를 정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라 불참자에게는 처절한 응징이 가해질 것임을 수 차례 경고했다.

모두 프랑스식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메뉴 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름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하다 남프랑스와 스페인이 떠올랐고 나는 피페라드에 꽂혔다. 하지만 본식이 되려면 피페라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민하다 인턴 시절 스태프 밀로 먹었던 닭 피페라드를 떠올렸고 닭을 새우로 대체, 부족한 단백질은 계란과 흰살 생선으로 보충하기로 마음먹었다. 샘플이 될 만한 레서피들을 찾다보니 흰살 생선과 피페라드, 수란의 조합은 꽤 흔한 편이더라.

그날 아무도 몰랐던 것 같지만 한가지 신경썼던 것이 샐러드의 색과 디저트의 색이었다. 소르베티에 없이 한 시간에 한 번씩 포크로 긁어가며 그라니타와 소르베를 만들던 중 블루베리의 보라와 망고의 노랑에 영감(?)을 받아 그린 샐러드에 적양배추와 노랑 파프리카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전식과 디저트가 너무 멀어서일까 별 반응은 없었다. 다음에는 그렇게 포인트 컬러가 있을때 테이블에 같은 색깔의 센터피스를 함께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골든볼과 알스트로메리아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지난 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꽃 장식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날의 막내 보라죵이 엄청나게 근사한 꽃다발을 안겨주어 굉장히 기뻤다. 아나킴이 오래 전부터 갖고 싶던 스타일의 멋진 꽃병을 가져다 준 직후라 더욱 반가웠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별 탈 없었던 전식에 비해 짜게 되어버렸던 피페라드였다. 가자미 필레가 슴슴했다면 조금 나았을텐데 생선도 딱 맞게 간이 되어버려 같이 먹었을때 상당히 간간했다. B 토마토 소스를 쓸때 유의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 짠맛인데, 아직 가늠을 잘 못하겠다. 시판 토마토소스 특유의 단 맛이 없어 애용하지만 조금만 가열해도 금새 짜진다. 가열을 할때는 생 토마토나 스톡을 이용해 간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피페라드에 얹은 계란의 굽기도 아쉬웠던 것이, 오븐에서 좀 늦게 빼는 바람에 키쉬에 들어가는 계란처럼 거의 완숙이 되어버렸다. 다음에는 수란을 얹거나 오븐에서 빼는 타이밍에 유의해야겠다. 그나마 곁들일 흰빵이 있어 다행이었고, 가자미 필레는 단순한 맛임에도 다음날 생각나더라는 칭찬을 들어 위안이 되었다.  

사는 곳도 하는 일도 각양각색이라, 다시 그렇게 모이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함께 한 때를 보냈던 파리에서의 우정을 기념하며 모여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 수 있어 즐거웠다. 덧붙이자면 다들 어찌나 와인을 술술 넘기는지 식전주로 개시한 크레망은 따르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알콜쓰레기 나와 박실장이 잔을 덮은 후에도 와인 두 병이 우습게 사라지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파리 런던 서울 광주에서 모여준 고마운 아가씨들, 그런 우리의 완벽했던 원 써머 나잇 One summer night 이었다.

Photo by 박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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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3
Menu été

•전식 Entrée
키쉬 로렌&그린 샐러드

•본식 Plat
가자미 필레 버터구이/새우 피페라드/감자 구이

•후식 Dessert 
블루베리 그라니따&망고 요거트 소르베

•미냐르디스 Mignardise
초콜릿 트러플&피스타치오 루쿰
민트 티

•와인 Vins
리무 크레망
수아베 클라시코 수페리오레
부르고뉴 피노 누아

Guests
HN Kim
NH Park
HN Yoon
DR Lee
BR Jeon

MERCI.
2014/08/13 11:58 2014/08/1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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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접시 닦기


유학 시절 끌어모은 오만가지 살림을 모두 끄집고 귀국하면서,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서울에 거처가 마련되면 큰 식탁을 장만해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자. 서로 잘 알고 함께 보낸 시간이 충분하며 음식을 한 가지쯤 망치고 화이트 잔에 레드를 따라 대접해도 괘념치 않을 아주 좋은 친구들만. 한 달에 한 번은 무리. 그렇다고 일년에 한 두 번은 드물다. 그러니까 한 분기에 한 번, 한 계절에 한 번으로 하자. 이상적인 멤버는 여섯 명. 물론 나는 친구가 많지 않으니 절친들을 모두 끌어모아도 육인용 테이블을 채울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내 몇 안되는 절친들은 대인관계가 원만해 좋은 친구들이 많고 그 중에 몇몇은 나와도 반기는 사이이니 손님 구성은 문제없다. 적어도 1년은.

그렇게 시작한 첫번째 손님 초대였다. 확장 6인용, 최대 8인까지 소화할 수 있는 나의 자랑스러운 익스텐션 테이블은 안타깝게도 의자가 준비 되기 전이라 사용할 수 없었다. 커다란 식탁을 옆에 두고 앉은뱅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도 유쾌한 나의 손님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주빈으로 정한 커플이 공식적으로 임신을 발표했고 섭섭했던 지난 일에 대한 짧은 성토대회와 '너네는 언제?'를 주제로 다른 유부클럽 멤버들의 자녀계획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기억을 위해 덧붙이자면, 저마다 발리에서 온 쿠키, 모리셔스의 바닐라 티, 와인과 엄청나게 큰 휴지까지 들고 찾아와 준 점잖은 손님들이었다.

전체적으로 완전히 망한 품목은 없지만 수정해야 할 흠들이 여럿 있었다. 양파스프는 맛이 기대 했던 것 보다 좋았지만 오븐 그릴 밑에 너무 오래 두는 바람에 그뤼에르의 색깔이 많이 진해졌다. 프랑스에서는 흔히 보는 정도였지만 탄 음식에 거부감이 있는 한국 친구들에게 대접할때는 색깔을 덜 내는 게 좋아보인다. 연어 시금치 키쉬는 맛도 굽기도 마음에 들었다.

프리카세 드 볼라이는 만들면서 애를 좀 먹었지만 진한 닭 육수맛에 대호평을 받았다. 다만 서빙할때 접시에 소스를 전부 부은 것이 옥의 티. 고기위에 적당히 끼얹어주고 소스 보트에 따로 서빙했으면 훨씬 보기 좋았을텐데. 풍성하게 준비한 그린 샐러드는 녹색과 방울토마토의 빨강이 대비되어 예뻤다.

전식과 본식이 손이 많이 가는 종류들이라 디저트는 간단하게 초콜릿 퐁듀를 준비했는데 반응은 가장 뜨거웠다. 역시 딸기와 초콜릿은 어딜 가나 사랑받는 조합. 다만 초콜릿을 그냥 퐁듀그릇에 편안히 녹이면 되었을 것을 미리 중탕하면서 바닥 온도가 너무 올라가 초콜릿이 눌어 붙는 바람에 나중에는 초콜릿을 긁어먹어야 했다. 망고와 딸기를 좀 더 내고, 페퍼민트 티로 마무리 했다.  

이윽고 떠들썩했던 저녁식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니 자정이 되었다. Fip을 들으며 접시들을 정리했다. 



2014. 3. 15
Menu Printemps

양파 스프/ 연어 시금치 키쉬
프리카세 드 볼라이 / 쌀밥 / 그린샐러드
밀크 초콜릿 & 과일 퐁듀

Guests
JM Lee & JYR Yoon
BM Kim
HS Ham
MH Ryoo

MERCI.
2014/08/12 22:32 2014/08/1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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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안삼환 옮김
민음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대한 관심은 한 장의 판화에서 비롯되었다.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그날그날 일정을 만들어 움직이던 나는 문득 비엔나에서 읽은 어느 칼럼 내용을 떠올리고 케테 콜비츠 미술관에 들리기로 결심했다. 나란히 자리한 베를린 문학의 집 내 겨울정원Wintergarten’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들린 그 미술관은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나를 맞이해 샘물을 퍼주듯 소탈한 손길로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감흥이라는 단어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종의 따뜻한 깨우침에 나는 부끄러운 눈물을 흘렸다. 그 가운데 위의 판화 씨앗에 쓸 밀은 빻아서는 안된다 Saatfrüchte sollen nicht vermahlen werden가 있었다. ‘Seed Corn Must Not Be Ground’라는 영문 제목을 메모해두었다가 찾아보니 괴테의 작품에서 발췌된 문장이었다. 귀국하면 곧 찾아 읽기로 결심했다. 내게 그토록 아름다운 경험을 선사한 후에, 콜비츠는 나를 괴테에게로 이끌어 준 것이다.

 

독일 문학에 문외한인데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문학사적 의의나 교양소설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줄곧 이 작품을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애시대정도로 생각했다. 세계문학이라는 범주 안에는 참으로 많은 남성 연애 편력기가 있구나, 즐거워하며 이걸 다 읽으면 오래전에 읽다 만 겐지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쉬운 남자 빌헬름의 연애는 릴레이 계주 마냥 계속된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는 중반부에는 '햄릿' 을 읽고 싶어졌다. 빌헬름이 오합지졸 단원들을 모아놓고 햄릿에 대해 열정 충만한 해석을 늘어놓는 부분에서 기억 저편 학부시절 문학의 언저리에서 맛보았던 즐거움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얇게 잘라 만든 스티커를 붙여가며 후반부를 읽는 동안에는 괴테를 비단 소설가라 칭할 수 없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초중반부 부터 빌헬름이나 그 외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들려주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괴테의 성찰에서는 이미 재주 있는 이야기꾼, 재능있는 작가의 경지를 넘어선 현인의 면모가 엿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괴테의 장기자랑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 막바지에 이르면 등장인물들의 과거사와 출생의 비밀이 숨막힐듯 전개되어 막장드라마는 명함도 못 내밀 말초자극이 연타로 찾아오니, 무려 4세기동안 책을 팔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흥행력에 탄복할 따름이다. , 하나 잘하는 놈 다 잘한다더니, 미남인데다 머리 비상하고 능력 있고 풍류도 알면서 명까지 긴 이 말도 안 되는 남자는 왜 18세기에 태어난 것인가. 아니 도민준도 사백 살이라면서, 어딘가에서 천송이 같은 여자와 여전히 연애 중이신가. 그런 건가 괴테도.

 

그런 생각들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장을 덮고 보니 다음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영 모르겠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다만 파고 또 파도 공부할 거리가 나오는 이런 바이블 같은 작품은 일자무식 문외한도 밀쳐내는 법 없이 무언가 하나쯤은 들려 내보내는 법이니, 마지막으로 얻어 걸린 키워드는 교양소설이다. 독일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소설 유형으로 개인의 자아형성과 사회 통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소설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는데, 그중에서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교양소설의 본보기라니 나 이런 책 읽었노라 뽐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루한 힙스터들마저 끌어안는 넓은 가슴의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유리알 유희역시 교양소설의 대표작에 속하나니 바야흐로 나 빼고 모두가 읽었다는 헤세에 손을 댈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책 밖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몹시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하나 얻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삼년은 관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며 랄라랄라 다니는 중인데 최근 같이 일하는 아저씨가 남성 갱년기 증상으로 동료들을 들들 볶아 행복한 나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불똥을 맞고 보니 발걸음도 가볍던 출근길이 순식간에 보통 출근길이 되어버렸다. 본래 우울이란 게 몇 방울이라도 한 번 물이 들면 사실은 그렇지도 않건만 빨아서 아무리 야무지게 짜내도 영영 깨끗하게 빠지지 않을 것만 같다. 무언가 그런 분위기가 이어져 영 심기가 불편하던 어느 날 퇴근길에 읽은 괴테의 일생과 파우스트에 대한 칼럼은 그런 내 감정의 얼룩을 한방에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천재의 빼어난 일생과 빼어난 업적은 범재를 좌절하게만 하는 것 같지만 때로는 햇볕과도 같다. 그런 절대 우위의 본보기가 어슴푸레한 속을 침울하게 더듬는 범인의 마음을 밝혀주기도 하는 것이다. 볕은 만인의 머리 위를 비추고 머리카락 사이의 곰팡이를 털어주며 비타민 D도 보충해준다. 고전은 그런 존재이기에 의지해 살 만한 것이다.    

2014/02/17 15:11 2014/02/17 15:11